산문 부문 [차상]

은영에게
문예인의 숲
“앗, 안 돼!”
아이가 파도에 휩쓸려가는 조개껍질과 돌멩이 따위를 작은 발로 쫓는다. 앙증맞은 이목구비에 일순 허망함이 어렸으나, 아이는 곧 아무렇지 않게 모래사장에 걸린 조개껍질들을 다시 주워 와 하던 일을 계속한다. 고사리 같은 손이 대체 뭘 완성하고자 바삐 움직이고 있는지 짐작도 안 갔지만, 기껏해야 다섯 살쯤 됐을 아이의 얼굴이 너무나 진중하기에 나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1월임에도 이렇게 포근한 날씨에 바다를 구경할 수 있다는 사실로 사람들은 퍽 들뜬 것처럼 보였다. 관광지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아 언제나 한적한 이 마을에도 오늘은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지루할 틈 없이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은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어린아이의 완성작을 볼 수 없다는 건 조금 아쉬웠으나 더 앉아 있다가는 다리가 그대로 모래 위에 굳어지겠다 싶어 무릎을 툭툭 치며 일어났다.
해변의 모래알들을 끊임없이 정렬하는 느린 파도와, 작은 마을을 품은 둥지처럼 늘어선 산줄기.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여유로운 삶을 보낼 것이라 흔히들 말하지만, 사실 이 마을에서 한가로운 사람은 나뿐이다. 오직 나만이 느리게 걷고, 목적도 없이 바다를 구경하고, 여유롭다 못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괴로워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곳의 사람들은 나를 해치지도, 나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아무 이유 없이 나는 매일같이 상처를 입었다. 이미 보기 흉하게 덧난 상처 위에 손톱을 세워 긁어대는 건 결국 나라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왜인지 멈출 수가 없었다.
일자로 길게 뻗은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걷다 보면 마주치는 골목 끄트머리의 작고 낡은 집이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칠십 세가 넘으신 할머니 혼자서 지내시던 집인데, 6개월 전쯤 돌아가시고 텅 비어있던 이 집에 내가 도망치듯 들어온 거였다. 멀리서 볼 땐 집 앞에 선 물체가 웬 화분인가 했다. 그러나 50미터쯤 거리를 두고 보자 그게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더 가까워지자 내가 아는 얼굴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얼굴은 하얀 담벼락에 기대 땅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자박거리는 내 발소리가 들려오자 내내 주인을 기다린 강아지처럼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얼굴을 홱 들 때의 기세는 어디 가고 조금 쑥스러운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은영이 맞니?”
반쯤은 기대, 반쯤은 조마조마한 얼굴에서 그녀의 솔직함이, 그리고 변함없는 순수함이 엿보였다. 그녀와 가까이서 다시 눈을 마주하자 나는 당혹감에 어쩔 줄을 모르고 부자연스럽게 눈을 피했다. 아마 내 얼굴은 어느새 하늘을 물들인 노을에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새빨갛게 되어버렸을 것이다. 부끄러운 마음에 그녀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시기 전 할아버지가 자주 입으시던 낡은 체크 남방도, 양말을 신지 않은 발과 허름한 검정 슬리퍼에 잔뜩 앉은 모래 먼지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뭔가 말을 하려 해도 목이 메어, 간신히 낸 볼품없는 소리는 음절조차 되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졌다.
“은영아, 나 기억하지? 나 연수야. 아빠가 편찮으셔서 잠시 내려왔는데…, 오랜만이다.”
보통 소꿉친구와의 15년 만의 재회란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반갑지 않은 얼굴이라 하더라도 반가운 척은 했어야 도리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친구의 상냥함에도 어색하게 고개를 한번 까딱이고는 그녀를 지나쳐 집의 대문을 열고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조건 없는 친절을 베푸는 그녀라도 이로써 나에게는 질려 버렸을 것이다.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해변을 걸어오며 오늘 저녁엔 김치찌개를 해 먹어야지, 생각했는데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 방문을 여니 작은 방 안을 노을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의 방에 유일한 작은 창문으로는 수평선이 마주 보인다. 창문이 작아서 불만이었던 건 처음뿐, 이 창문으로 밖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어느 유람선의 객실에 머물고 있는 듯 한 기분이 들어 나는 허름한 방구석조차도 낭만 어린 항해의 일부로 느끼게 되곤 했다. 오랜 친구의 여전한 눈망울, 어린아이의 작은 손.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인상에 나는 이불을 끌어 와 깊게 얼굴을 묻었다. 오랜만에 느낀 체취가 날 감싸 애써 떨쳐보려 이불 속에서 한참 동안을 그러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자꾸만 요동치는 파도처럼 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철이 없고 순수한 고등학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세상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었고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삶의 아픔만은 빨리 배웠다. 유년 시절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 형편 탓에 부모님께서는 갑작스러운 이혼을 하셨고 그 후 우리 가족은 어머니와 나뿐이었다.
주제 : 연대

그래도 사랑으로 보듬어주시던 조부모님이 계셨기에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었다. 어느덧 자라서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그 기억도 어린 시절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 뿐이며 앞으로의 내 삶은 온통 행복으로만 가득 찰 것 같았다. 정말 그럴 줄만 알았다. 그 아이와 얽히기 전까지는.
고등학교 입학식, 새 학년 새 학기 첫날이라 그런지 어젯밤엔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중학교를 끝으로 홈스쿨링은 끝을 내고 엄마와 약속했던 대로 아픈 기억을 간직한 그 동네와는 이제 영원한 작별 인사를 하고 조부모님이 계시는 바닷가가 자리한 작고 예쁜 마을로 이사를 왔다. 이제는 정말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후련하면서도 설레었다. 설렌다는 감정이 얼마 만인지 이제 여기에서는 행복만 일들만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도 드디어 친구가 생긴다는 생각에 심장 박동이 요동치듯 쿵쾅거렸다. 어린아이같이 설레하며 호들갑을 떠는 스스로가 우스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한참이나 서서 바라보았다.
“은영아 어서 와서 밥 먹어. 국 다 식겠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간소하지만, 정성이 담긴 반찬들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엄마표 김치찌개로 가득 찬 상차림이 오늘따라 더 마음에 들었다. 출근하느라 정신없는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고대한 입학식을 위해 아침부터 찌개를 끓여주는 정성을 알기에 얼른 밥 한 공기를 후딱 해치우고는 힘차게 대문 밖을 나섰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아침부터 엄마랑 식탁에서 너무 많은 수다를 떨어서인지 하마터면 스쿨버스를 놓칠 뻔했다. 겨우 일분이라는 시간을 남겨두고 간신히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벌써 스쿨버스엔 학생들로 빼곡했다. 한적한 바닷가가 보이는 해안도로를 십오분 남짓 달려 드디어 학교 앞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답답한 버스에서 탈출하려고 다들 미친 듯이 달려 나간다. 얼떨결에 나도 같이 내렸다.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다. 교복 정리를 하려고 가방을 다시 고쳐 매려던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한 여학생의 목소리, 수많은 사람이 모인 정문 앞이지만 왜인지 나를 향해 부르는 목소리인 것 같았다.
“저기요.”

혹시나 하고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 한 여학생이 나를 향해 서 있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나와 같은 신입생인 것 같았다.
“내리시다가 손수건을 흘린 것 같아서요. 전해 드리려고요.”
맙소사. 손수건을? 설마 하고 보아하니 진짜 그 손수건이었다. 엄마가 나를 임신하셨을 때 아빠가 나를 위해 손수 만든 그 손수건. 미쳤지. 함은영 그게 너한테 어떤 손수건인데 두고 내려.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었기에 더욱더 당황스러웠다. 그러면서 본인도 등굣길에 정신 없었을 텐데 이런 것까지 챙겨주고 정말 고마울 따름이었다.
‘저기. 너무 감사해요. 나중에 꼭 은혜 갚을게요! “
뭐라도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은데.. 괜히 푼수 같아 보이려나? 부담스러워하려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입학식을 알리는 안내방송에 서둘러 감사한 마음을 전한 후 바로 운동장으로 이동했다. 늘 반복되고 똑같던 일상에서 벗어나 아침부터 벌써 이렇게 많은 일이 생기다니 새롭고 정신없지만 싫진 않은 기분으로 강당에 도착했다. 서둘러 반 배정을 확인한 후 내 반을 찾아 줄을 섰다. 늦게 도착해서인지 벌써 친구들끼리는 삼삼오오 짝이 되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친구 사귀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허무함에 빠진 그때 아까 맡았던 그 향기가 훅 들어왔다.
“어? 너도 1반이야? 잘됐다! 우리 올해 잘 지내보자! 나는 송연수라고 해”
세상 참 좁다더니 아까 나에게 손수건을 전해주던 그 아이였다. 홀로 버려진 섬에 아는 이가 찾아와준 기분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숨긴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반가워. 나도 잘 부탁해. 나는 함은영이야.”
여름방학이 오기 전까지 우린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였다. 주위의 친구들마저 너희 둘은 영혼의 단짝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연수는 나와 공통점이 많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아이였다.

공통점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둘 다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랐다는 점. 처음에 연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적잖이 놀랬었다. 연수는 조그만 그늘조차도 보이지 않은 구김살 없이 항상 밝고 웃음으로 가득 찬 아이였다. 연수 어머니께서는 연수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암이 심각해져 세상을 떠났다고 하셨다. 그래서 지금은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고 조부모님께서 집에 자주 들리신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난 벌써 눈에 눈물이 고이는데 연수는 이제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다며 달관한 표정으로 웃음 지으면서 오히려 날 위로해주던 아이였다. 그리고 늘 나를 품어주던 아빠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워주던 그런 아이였다. 그런 그녀와는 영원한 친구로 지낼 줄 알았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7월 말, 학교는 여름방학을 했고 집에 박혀서 에어컨만 틀어놓을 계획이었는데 때마침 에어컨이 말썽이었다. 하필 또 주말이라 고칠 방안도 없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와중, 참을 수 없는 더위에 결국 엄마는 잠시 할머니 댁에 갔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온다고 했고 씻는 게 귀찮았던 나는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집에 있겠다고 했다. 엄마가 떠나고 한 시간도 안 지나 후회를 하던 중 마침 연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때마침 아버지께서 저녁에 들어오신다는 말과 함께 집에 영화를 보러 오지 않겠냐는 솔깃한 전화였다.
“좋아! 마침 심심했는데 잘 됐다!”
고민할 새도 없이 나는 연수의 초대를 수락했다. 참을 수 없는 더위 때문에 가겠다고 한 것도 있지만, 사실 연수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친한 친구 사이였지만, 나는 연수의 집에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연수는 집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은근히 화제를 돌렸다. 이는 나에게 항상 작은 서운함으로 자리 잡아있었다. 하지만 연수의 초대 한 번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 어느새 나는 집 주소를 물어보고 있었다.
"어디로 가면 돼?"
나는 검은색 삼선 슬리퍼를 대충 신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연수의 집은 우리 집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푹푹 찌는 날씨에 오르막길을 계속 오르다 보니 시야가 아득해졌다.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 눈앞에 새하얗고 커다란, 어딘가 신비한 집 앞에 다다랐다.
"뭐야.. 송연수 완전 부자 아니야?"

뭐라도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은데.. 괜히 푼수 같아 보이려나? 부담스러워하려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입학식을 알리는 안내방송에 서둘러 감사한 마음을 전한 후 바로 운동장으로 이동했다. 늘 반복되고 똑같던 일상에서 벗어나 아침부터 벌써 이렇게 많은 일이 생기다니 새롭고 정신없지만 싫진 않은 기분으로 강당에 도착했다. 서둘러 반 배정을 확인한 후 내 반을 찾아 줄을 섰다. 늦게 도착해서인지 벌써 친구들끼리는 삼삼오오 짝이 되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친구 사귀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허무함에 빠진 그때 아까 맡았던 그 향기가 훅 들어왔다.
“어? 너도 1반이야? 잘됐다! 우리 올해 잘 지내보자! 나는 송연수라고 해”
알 수 없는 배신감에 휩싸인 나는 커다란 집의 대문 앞 부착된 초인종을 세게 눌렀다. 고요한 여름 공기 속 초인종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황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연수가 대문을 활짝 열어 반겨주었다.
"왔어? 어서 들어와! “
그렇게 나는 눈처럼 새하얗고, 신비로운 집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아래로 추락했다.
“뭐야...나 지금 어디로 떨어진 거지? 발을 잘 못 디뎠나? “
싸늘한 바람과 불쾌한 습기가 내 주위를 감쌌다.
"연수야!!!"
몇 번을 불러도 연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돌아오는 건 내 목소리뿐. 진짜 지랄 맞다, 혼잣말을 하며 까마득해하던 순간, 시야가 밝아졌다.
“아아...머리야...”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에 머리를 한 손으로 지탱하며 몸을 일으켰다.
“은영아 일어났어? 많이 지쳤었나 봐. 잠들었더라”
온기를 품은 미소와 연수의 음성을 일치시키려 노력했다.

웬 사건인가 싶었는데, 꿈을 꾸고 있었다. 연수와의 첫 만남과 그때의 시절을 떠올리며 잠들었나보다.
나는 나의 이런 무력함에 또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이런 것이 이제는 너무 지겹다.
나름 유쾌했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유쾌함이 이제는 씁쓸한 취나물 향 같이 느껴진다. 그래. 취나물향. 연수의 삶은 그런 향이 났다. 꿈처럼 연수의 집은 크고 좋지 못했다. 오히려는 평범하지도 못했다. 나는 연수를 만나고 내가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수는 자주 울지 않았다. 오히려 자주 웃었다. 지극히 평범한 나를 매번 수많은 웃음으로 감쌌다. 연수의 그 따뜻하고 고요한 향기가 내 몸을 감싼다. 우리는 반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는 알아주는 절친이었다. 교실의 그 누가 우리의 미래를 예상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15년만에야 얼굴을 마주하게 되리라고 말이다. 사실 나는 그동안 연수를 영영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이따금씩 들리는 연수의 근황, ‘그림을 그린다더라. 는 소리를 듣고 찾아갔었다. 그녀의 전시회는 그녀의 그림과,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비교적 인적이 드문 거렸던 그녀의 삶과 대치되었다. 나는 그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질투가 났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미워서 울었다. 그녀의 얼굴을 멀리서 훔쳐봤다. 웃고 있었다. 나는 학창시절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목격하고 싶어 했다. 그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걸 숨기고 싶은 발버둥처럼 보였다. 결국 나의 그 소원은 이뤄졌다. 그 소원을 이루자마자 우리는 이별했다.
연수의 얼굴은 미술선생으로 인해 일그러졌다. 그녀의 삶도 얼룩졌다. 얼룩진 삶은 더 얼룩졌다. 나는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했다. 그리고 뒤돌아섰다. 무서웠다.
그녀도 무섭고, 미술선생도 무섭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무서웠다. 도망가는 것이 나에게 가장 속 편한 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도망치기로 결정한 순간 그녀와 나는 이제 끝이란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 미소의 상실이라는 소원을 영원히 이룬 상태이길 바랐던 걸까. 나는 아직도 그 시간에 머물러 있다. 속으로는 그녀가 연락이 오면 받아줄 것이라고 다짐했다. 도망친 주제에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럴 줄 알고 있었다. 나는 내 기억 속의 너를 철저히 이용했다. 그녀의 꿈을 일 년에 몇 십번씩 꾸었다. 죄책감일까 아니면 쾌감일까. 둘도 없는 단짝을 죽여 버린 나를 경멸한다. 그녀의 잊지 못할 그 경험은 등단의 바탕이 되었다. 그녀는 센세이셔널한 상징이 되었다. 첫 번째 전시회에 손수건 그림이 있었다. 아무런 설명이 없는 그림이었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엔 아무리 내가 그녀에게 모욕을 주었어도 하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너무 죽고 싶어서 그림에 등을 돌리려 할 때, 손수건에 적힌 작고 앙증맞은 글을 본다.
To Eunyoung.
그런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가녀린 팔목을 본다.
그녀의 향이 난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싶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