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산문]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여자들_강정은
- 운영자
- 2021년 3월 25일
- 2분 분량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여자들
강정은
때를 맞은 여자들은, 달린다.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를 향해 달리다 뒤돌아 다른 여자를 응시하며 자신이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 왔노라고 말하며 웃는 여자같이 달린다. 그를 불안하게 뒤쫓던 여자는 묻는다. 죽음을요? 달리던 여자는 말한다. 달리기요.
여자들은 달리면 죽으리라 의심받고 달리고 싶어서 죽었다 추측되고 달리는 방편으로 죽으려 들 테고 죽고 싶지 않아 달리기를 시작하고 죽음을 감수하고 달리기를 이어간다. 이때 달리기란 시선이 주파하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 행위다.
이민경, 『피리 부는 여자들_긴 행렬을 부르는 그림』, p.110.
친구들과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고 난 후에 나는 학교와 가까운 집을 놔두고 지하철역, 혹은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통학하는 친구들을 바래다주기 위해서다. 이런 내게 친구들은 묻는다. 돌아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은지, 밤에 혼자 걷는 게 무섭지는 않은지. 글쎄, 누군가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이 쓸쓸하거나 무섭게 느껴진 적은 거의 없다. 차분한 밤공기를 맞으며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고, 때로는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지나온 길을 다시 걷는 일이 즐겁기만하다. 그렇게 친구들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충만한 마음을 품고 잠들곤 한다.
아주 피곤한 날이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를 꼭 바래다주게 된 것은 작년부터였다. 나누고 싶은 말은 많은데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지니 우리는 걷고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 이야기는 속 깊은 이야기일 때도, 실없는 농담일 때도 있었다. 헤어짐이 아쉬워서 역의 플랫폼까지 배웅하고 나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연락을 주고받는다. 잘 들어가, 오늘 재밌었어, 다음에 또 만나. 집에 잘 들어가라는 연락과, 함께 보낸 하루가 행복했다는 말과,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 그리고 아침이면 또 이어지는 연락. 잘 잤니, 오늘 하루도 잘 보내.
친밀감이란 어떤 감정일까. 주위 친구들에게 친밀감에 관한 생각을 물어보니 사람마다 떠올리는 것이 다 달랐다. 서로에 관해 잘 알고 있고,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어색하지 않은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 마주보면 웃음이 나고, 힘들 때 의지할 수 있고, 서로에 대한 불만을 터놓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긴밀하다고 느끼는 감정. 그 깊이와 무게는 사람이 맺는 관계의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인간관계를 숙제처럼 여겼던 나는 작년부터 뜻이 맞는 여자들과 친해지면서 관계 맺는 일의 중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용기 내어 다가가고,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 알게 됐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주변인들로부터 살아갈 힘을 얻는다.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달리는 여자들은 어딘가를 향하는가. 시선이 꽂히는 다른 여자에게로 움직일 때, 여자는 운동한다. 사랑하는 마음이 운동하며 운동하는 가운데 사랑하고 운동을 사랑한다.
... 남성이라는 매개 없이도 서로를 응시하는 방법을 알아낸 여자들은 오래도록 시간을 보내고도 헤어지고 싶지 않아 자꾸만 뭉쳐 다니고 거리낌 없이 집을 드나들고 헤어지고 난 뒤에도 곧장 통화했다.
이민경, 『피리 부는 여자들_긴 행렬을 부르는 그림』, p.111-112.
함께한다는 것. 옆에 있다는 것. 같이 밥을 먹고, 생산적인 일을 함께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의 즐거움. 걱정과 고민거리를 나누고, 조건 없는 친절을 베풀며, 조금이라도 더 붙어 있고자 서로를 배웅하는 것. 돌아가는 길에도 집에는 잘 들어갔는지 연락을 주고받고, 밥은 챙겨 먹는지, 어떤 것을 먹었는지 궁금해하고, 자주 보는 사이여도 또 보고 싶어하는 것.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나를 수놓고 있다.
홀로 세상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외딴 섬이 자신과 비슷한 섬들을 만나 하나의 큰 제도(諸島)를 이루었다. 내면에만 머물렀던 이야기들이 주파수가 맞는 목소리를 만나 비로소 세상을 향하고 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달리기를 주저했던 여자들이 서로를 향해 망설임 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여자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또 앞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멋진 여자들과 함께 그려나갈 세상이 기대되지 않는가. 우리는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질 테다.
주제 :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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