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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장/산문] 바다 위의 연대_파도

  • 작성자 사진: 운영자
    운영자
  • 2021년 3월 25일
  • 2분 분량

바다 위의 연대

파도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 그것은 청소년기의 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친구도 있고, 선생님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지만 와글와글 모여서 노는 아이들 틈에는 잘 끼지 못했다. 이사를 자주 다녀서 그랬을까. 학교에 가기 전 몇 번의 수술과 잔병치레로 병원을 밥 먹듯 들락거린 탓일 수도 있겠다. 엄마 말로는 병원을 하도 많이 다녀서 나중에는 병원 간호사 선생님들이 생일파티도 해줬다고 한다. 어쩐지, 술 마실 때 알코올 냄새가 역하지 않더라.


친구가 아주 없지는 않아서 그랬는지, 원래 성격이 그런지 외로움을 타본 기억은 거의 없다. 친구가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가거나 점심시간같이 시간이 붕 뜰 때는 항상 학교 도서관을 찾았다. 학교를 마친 뒤에도 도서관을 자주 찾아서 사서 선생님도 나를 기억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사서 선생님을 몇 번 찾아간 적이 있을 정도였다. 친구들과의 약속 장소도 주로 도서관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종업식날, 친구들을 만나러 학교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성추행을 당했다.


엄마에게 울면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설명했지만, 엄마는 내가 그 일을 빨리 잊어버리길 바랐다. 그러나 9살의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나는 나름대로 벌어진 상처를 메우려 애를 썼다. 별거 아니라고도 생각해보고, 조치를 취하지 않은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다. 계속해서 발버둥을 쳤지만 그건 바다에서 가라앉지 않게 해줄 뿐, 비를 막아줄 수는 없었다.


깊은 바다에서 작은 빨대로 숨을 쉬고 있는 느낌이었다. 상담 기관 같은 곳은 찾아볼 생각도 못 했다.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고, 내가 당한 일은 별거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틀어주는 영상을 하나 보게 되었다. 성폭력 예방 시청각 자료였는데, 성폭력 피해자가 겪는 어려움을 담은 미니드라마였다. 다들 자거나 자습을 하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펑펑 울어버렸다. 놀란 담임 선생님은 나를 복도로 데려가셨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던 친구를 통해 자초지종을 들으셨다. 선생님은 나를 꽉 안아주며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셨다.


그날 이후로는 마음이 한결 가뿐해졌다. 이따금 몰려오는 우울과 자괴감, 후회를 모두 막을 수는 없었지만 담임 선생님 같은 부표가 점점 늘어날수록 파도에 떠내려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이제는 파도에 휩쓸리더라도 잡을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연대라는 이름의 부표가 많아질수록 나는 더 넓은 바다를 탐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도 바다를 마음껏 누빌 수 있도록, 당신의 바다에 부표를 띄운다.



주제 :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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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명여자대학교 제53대 중앙비상대책위원회 '눈보라' 연대복지국 산하 숙명여성의달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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