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산문] (무제)_산호
- 운영자
- 2021년 3월 25일
- 2분 분량
(무제)
산호

어느 날, 뉴스를 보다가 우연히 강경화 장관님의 이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계속 미적거리며 미뤘던 머리를 확 잘라치우기로 했다. 투블럭처럼 자를 용기는 없었지만 숏컷으로 먼저 자르기로 했다. 그렇게 짧아지다 보면 나는 어느새 남동생이 하는 투블럭도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며.
탈코르셋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보자면 이 이야기부터 하고 싶다.
몇 년 전 겨울, 카이스트에 갔을 때였다. 카이스트에서 열린 한 캠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기숙사에서 지내며 한 달 내내 코딩만 하는 캠프였다. 그때쯤의 나는 화장을 자기관리라고 생각하며, 남들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화장하는 것이 부지런하고 성실하다는 착각에 빠졌을 때였다. 종일 코딩을 할 때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화장을 했고 긴 머리를 다듬었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그러던 와중에 캠프를 만드신 대표님과 면담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어김없이 긴 머리를 다듬고, 화장하고 면담을 하러 갔다. 대표님께서는 나에게 '아침에 준비하고 나오는데 남자애들보다 더 시간이 걸릴 텐데 힘들지 않냐' 라고 물으셨다. 시간이 더 걸린다는 건 화장 같은 걸 말씀하신 게 아니었을까.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기분 나쁜 물음은 전혀 아니었고, 나는 아침에 열심히 '자기관리하고 오는 성실한 나’에 취해서 뿌듯하게 전혀 안 힘들다고 대답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냥 그 물음이 인사치레로 들렸다. 낯선 환경에서 힘든 건 없느냐와 비슷한. 아마 정말 그런 의도셨는지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는지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여기서 중요한 건 내 깨달음인데, 몇 달 후에 탈코르셋을 접하고 나는 그때의 내 대답에 대해서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그때 그 캠프에서는 다들 개발에 열중하느라 새벽에 집에 들어갔고 다음 날 아침 자다가 일어나 그대로 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세수할 시간도 없이 머리에 까치집을 지고 오기도 하고. 그러면서 다들 미친 듯이 개발에 열중했다. 그때의 나는…. 그렇게 미치지 않았던 것 같다. 누구보다 부족하니 누구보다 더 미쳤어야만 했는데 말이다. 그때의 나는 열심히 하지 않았으며 코딩 한 시간 더 할 시간에 화장을 했던 것 같다. 전혀 문제의식 없이. 어느누구도 나에게 화장을 강요하지 않았고 여남 구분 없이 다들 머리 감을 시간 없이 코딩에 몰두하기 바빴으며 거기서 아침에 성실하게 블러셔를 바르고 온 건 나뿐이었다. 매주 자신이 개발한 게임, 웹사이트, 어플과 같은 결과물을 발표했는데, 아직도 기억이 난다. 허옇게 뜬 얼굴로 허접한 결과물을 자랑했던 것이.
이건 분명 대표님의 작은 물음에 대한 나의 확대해석일지 모르겠지만 그 확대해석은 나에게 어마어마한 의미를 줬다. 이후 정말 중요한 날 외에는 화장한 기억이 없다. 물론 여전히 중요한 날의 화장을 못 버린 나에게 자괴감이 들기는 한다.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 또한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자르고 나면 어색해서 너무 남자 같진 않은가? 이틀은 거울을 보며 생각하기도 한다. 내가 가진 강요받은 여성성을 버리는 것, 그것이 어렵다. 하지만 어디선가 본 글이 떠오른다. ‘나는 사회에 나가서 여성이고 싶지 않다. 인간이고 싶다.’
나중에 회사에 가서도 혹은 원하는 일을 하면서 ‘남’들은 로션 하나 바르고 일할 때 나는 블러셔까지 챙길 수는 없지 않은가. 안 그래도 멍청한 내가 남들보다 더해도 모자를 시간을 블러셔에 쓸 수는 없지 않은가. 탈코르셋은 분명 사회적 운동이지만 그 이전에 내가 이것을 이기지 못하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누구보다 나는 내가 잘 아니깐.
여전히 우연히 네이버 광고로 본 로라메르시에 블러셔 어느 색상이 예쁘고 그렇긴 하다. 망할 블러셔. 하지만 나는 화장품을 버릴 것이고 특별한 날에도 아무것도 없이 자신감을 가질 것이고 내가 원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차츰차츰 나는 탈코르셋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다 보면 남자들을 세워 놓고 한 자리를 차지하는 그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주제 :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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