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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장/산문] 내가 사랑했던 모든 여자들에게_사가

  • 작성자 사진: 운영자
    운영자
  • 2021년 3월 25일
  • 5분 분량

내가 사랑했던 모든 여자들에게

사가



안녕?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며 나는 수십 번 백스페이스를 눌렀어. 어색한 말투로 안부를 물어야 할지, 아니면 너도 아는 나의 소개를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면서 말이야. 편지 쓰는 것이 익숙하다고 생각해왔던 나라 이 편지 또한 쉽게 써 내려 갈 수 있을 줄 알았어. 하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다른 것 같아. 피리를 부는 여자들이 찾아왔었거든. 그들의 연주를 듣고 새롭게 가지게 된 하나의 눈이 많은 것을 바꿔 놓았어. 그 눈으로 미래를 그리고 현재를 읽다 보니, 자연스레 시선의 방향이 어디로 향했는지 너도 알 수 있겠지. 비밀스러운 목적을 지닌 채로 과거의 기억을 파고드는 작업은 기묘할 정도로 마음이 울렁거리는 일이었고, 그 안에서 나는 마치 고고학자가 된 기분이 들었어. 거기서 내가 무엇을 발굴해냈는지 알아? 그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 모르고, 혹은 모른 척 지나간 것들에 대해 말하고 싶어 네게 편지를 남겨.


너는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이 편지의 수신자를 고르기에 앞서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내 나름대로 정의 내려야 했어. 그 이유는 눈치챘겠지만 내가 사랑한 여자를 찾아야 했거든. 그러기 위해서는 도대체 사랑이 뭔지 정리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너무 어렵더라. 세상은 이 순간에도 사랑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고, 나는 꽤 오랫동안 그런 이야기를 즐겨 봤는데도 말이지.


사랑은 이미 우리 안에 있어. 너도 지금 사랑을 하고 있을 거야. ‘내가?’라는 의문이 충분히 들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밖으로부터 사랑을 배워왔지 않니? 미디어로 전달되는 사랑의 대부분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있잖아. 그리고 그 관계를 사랑이라고들 하잖아. 그들이 키스를 하든 대립을 하든 일을 하든 모두 다 사랑이래. 그냥 눈만 마주쳐도 사랑이라고 우기는 모습이 웃기지 않아? 사실 나는 웃긴 걸 넘어서 조금 소름이 돋기까지 했어. 그러한 맹목이 어디서 왔는지 따라가다 보니 불편한 진실과 재회하고야 말았어. 온통 외부의 사랑에 젖어있던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헤맸던 것은 그런 것들을 봐왔기 때문이었어.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행동이 아니라 주어와 목적어였던 거야. 너무 많이 봤음에도 몰랐던 것이 아닌, 너무 많이 봤기에 알지 못했던 거였어.


사랑의 사전적 정의는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이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기까지 와서도 내내 방황을 하다가, 내가 알고 있는 방식대로 해보기로 했어. 우스갯소리로 나 자신을 유사 이과라고 하고 다녔지만, 길이 막혔을 때 떠오르는 건 결국 그런 방법이었어. 사랑을 알아내고자 귀납적 추론을 했다고 하면 다들 괴상한 표정을 짓겠지? 나는 소파에 가만히 기대앉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고 즐거웠던 마음을 쫓아가서 그 뿌리를 파내었어. 그제야 거기에 새겨진 이름을 여러 마주할 수 있었어. 이름을 보고 사랑을 떠올릴 순 없었어. 나는 슬프게도 사랑을 지우고서야 사랑을 찾아낸 거야.


처음의 너는 그다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네가 너무 좋아졌어. 뺨의 주근깨와 얇은 눈꺼풀, 어딘가 구부정한 자세, 그리고 현란한 색깔의 후드 집업과 교복 바지까지 좋았어. 네가 마블 영화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내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라. 하나라도 더 할 얘기가 생겼으니까. 떨리는 마음으로 너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던 밴드 티켓을 내밀었던 것을 잊지 못해. 자랑하는 척 네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었지. 어린아이였을 때나 했을 법한 유치한 장난을 너와 하던 친구를 이해할 수 없다가 이내 그가 부러워졌었어. 그리고 어느 날, 멍하니 그냥 숨을 내뱉다가 불현듯이, 훗날 침대의 내 옆에 누워있는 사람이 반드시 남성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이렇게도 명확한데 나는 왜 헷갈렸을까?


그러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버거워 곧 그만뒀고, 이후엔 남자를 좋아했었지. 너는 나만큼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몇 년이 흐른 후에도 나는 종종 그 마음을 의심했어. 좋아했던 게 맞나? 맞다 하더라도 ‘성적인’ 의미로 좋아한 게 맞나?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는데 그럼 사랑은 아니지 않나? 그리고 사랑이라고 하기엔 얕지 않았나? 이제서야 나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되었어. 그건 사랑이 맞았다고. 의아하다면 생각해봐, J. 이 마음은 다른 주변인들을 향한 ‘보통의’ 마음보다 강렬했고, 동시에 ‘일반의’ 사랑과 다른 건 너도, 나도 여성인 것뿐이잖아?


확신은 아니지만 나름의 생각을 하고 나서 나는 그 이후로 내가 여성을 사랑한 적은 없다고 믿었어. 아주 최근까지는. 아까 말한 그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래서 나는 늘 내가 여성을 사랑할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은 의구심이 들었어. 그래서 계속 과거의 그 마음을 살폈던 것 같아. 그 마음이 유일무이한 게 아닐지, 심지어는 존재했던 것도 아니었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이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고 찬찬히 마음을 살폈을 때, 자연현상처럼 네가 떠올랐어. 정확히는 내가 네게 했던 행동이 먼저 떠올랐고, 네가 남성이었다면 또 쉽게 공식처럼 사랑이라고 확정 지었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지. 그런 식으로 나는 내 사랑을 또 잃을 뻔했어.


너의 첫인상은 희고, 어딘지 이상한 애였어. 이상하다기보단 알 수 없음에 가까울까. 너는 그저 같이 다니게 된 무리에 속하는 하나였었지. 네가 갑자기 나랑 놀자고 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가 그다지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네가 그렇게 말했을 때 티는 안 냈지만 정말 당황했어. 거절하면 더 어색해질까 봐 거절도 못 하고, 버스를 탄 채 30분이 넘는 거리를 달려 도착한 곳에서 너와 떡볶이를 먹었지. 먹으면서 우리가 이렇게 가까운 사인가? 싶을 정도로 깊은 얘기를 너는 내게 털어놓았는데. 아마 첫 중간고사 이후였던 것 같아.


그 이후로 너는 같이 다니는 아이에서 친한 아이가 되었어. 너는 내게 무언가를 숨기기도 하고, 나는 남자 때문에 너를 미워해 보기도 하고, 네가 내 고백을 대신 전해주기도 하며 한 해가 끝났지. 그다음 해에 너와 나는 제2외국어가 달라 반이 갈렸는데, 이상하게도 그러면서 더 가까워진 것 같아. 내가 폭풍의 중심에 있을 때 넌 하나밖에 없는 온전한 내 편이었어.


너는 상상도 못 하겠지만, 내가 사랑이라고 인정할 수 있었던 순간은 두 장의 종이에 얽혀있어. 우리는 과학탐구로 반이 나뉘었던 그때 둘 다 물리화학 반이었고, 수능 때 칠 과목으로 물리를 선택했지. 내 담임이었고, 1년 후엔 우리의 담임이 되었던 물리 선생님은 기출문제를 엮어서 책으로 나눠줬는데 답안은 안에 없어서 하나하나 찾아야 했잖아. 그러던 어느 날 네가 내게 답을 물어봤고 나는 모른다고 말했지. 맨날 EBS에 들어가서 답 확인하기도 귀찮았던 차에 그 물음이 있었고 나는 답안만 모아 인쇄하기로 마음먹었어. 그리고 말이야, 한 부를 더 뽑아 이상하게도 너한테만 주고 싶었어. 내 반에 친한 아이들이 있었고 걔네도 그게 필요했는데 너만 생각났어. 더 놀라운 건 뭔지 알아? 그 4년 치의 답들을 거의 완성하기 직전에, 네가 먼저 찾아와 내게 네가 만든 종이를 준 거야.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 그 안에는 나한테만 이걸 준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었어. 스테이플러 심으로 묶여있는 그 흰 종이 두 장을 받으면서 나는 고작 고맙다는 단어 한 마디만을 내뱉을 수 있었어. 고작 이게 사랑이며 사랑의 증거냐고? 하지만 K, 너도 네 반에 친한 친구들이 많았잖아. 너도 나와 마찬가지였잖아. 설사 너는 아니었다고 해도, 너를 몹시 소중히 아낀 이 마음이 나는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없어.


그다음 해에 같은 반이 된 너는 나와 같이 밥을 먹지도 않았고, 같이 다닌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너는 가장 확실한 내 사람이었어. 내 친구는 네 친구가 되었고, 네 친구는 내 친구가 되어서도 너는 달랐어. 네 친구가 된 내 친구와 문제가 생겼을 때, 그래서 내가 울었을 때 너는 나를 중앙 꼭대기 계단으로 나를 데려갔지. 나는 그토록 사람을 믿어본 적 없는 것처럼 울었어. 나는 눈물이 많았고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싫어했지만 네 앞에서 우는 건 부끄럽지 않았어.


반장이었던 네가 여자아이들을 향한 남자아이들의 불만을 알아차렸을 때, 그래서 선생님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을 때, 너는 나에게만 조용히 조심하라는 언질을 주었지. 나는 그 불만에 상대적으로 덜 일조하기는 했지만, 너의 말 덕에 나는 혼나지도 욕먹지도 않았어. 내가 재수했을 때는 너는 시험 보는 사람보다 더 꼼꼼히 시험을 챙겼잖아. 끊임없는 너의 상기에도 불구하고 멍청하게 수시 논술 지원 마지막 날에 그 사실을 알아차린 나의 급박한 SOS에, 2학기 첫 수업을 듣고 있던 너는 다 내팽개치고 나를 도왔고 결국 그 강의를 망쳤잖아. 친구 때문에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을 때 가장 먼저, 그리고 오직 떠오르는 건 내게 네 이름이었어.


내가 사랑했던 여자들에게, 로 시작하는 이 편지는 결국 너에게 닿지 못하겠지. 여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제야 허겁지겁 배워가는 나라서, 고르고 고르다 끝내 고여있고야 마는 마음들도 있다는 것을 너는 모를 거야. 증발하고 남은 흔적만으로도 네가 뒷걸음질 칠까 무서워 이 편지는 0과 1로 미지근하게 남길 테니까.


내가 사랑했던 사람아. 더 이상 너는 내게 현재형이 아닌 사랑이고, 그게 나를 슬프게 하지만 다행히도 너무 아프지는 않아.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돌아올 테니까. 그건 너의 사랑일 수도 있고, 너를 닮은 사랑일 수도 있으며, 너와 다른 사랑일 수도 있겠지. 언젠가 우리가 같은 길을 걷고 있길 진심으로 바라. 그때가 되면 나는 네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거니까.


진심을 담아, 코로나 시대로부터



주제 :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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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명여자대학교 제53대 중앙비상대책위원회 '눈보라' 연대복지국 산하 숙명여성의달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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