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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장/산문] 내 연대의 방식_들풀

  • 작성자 사진: 운영자
    운영자
  • 2021년 3월 25일
  • 3분 분량

내 연대의 방식

들풀



나는 머리로 한참을 생각한 후에 행동으로 옮기는 성격이다. 그 행동마저 결단력이 있지는 않다. 같이 장 보러 마트에 온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마지못해 전화를 걸었으니까. 그 날 마트를 안 갔더라면 운동에 대한 내 결심은 3달이 넘도록 머리속에서 숙성의 단계를 거쳤을 거다.

점 찍어둔 복싱장은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있던 곳이라 그런지 아주 낡고 노후한 건물 같았다. 강렬했던 원색 간판은 이미 잿빛이 돼버린지 오래인 것 같고 “복싱/킥복싱/다이어트” 라고 쓰인 글씨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자 허스키한 목소리가 싹싹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 복싱을 배우고 싶은데, 몇 가지 문의드릴게 있어서요.”


“네. 말씀하세요”


“제가 복싱은 처음이고 손목도 많이 안 좋은데, 배워도 괜찮나요?”


“그럼요, 차근차근 배우면서 익히면 됩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다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 잘 가르쳐줄 것 같아서. 둘, 지금 전화 받은 사람이 여자여서. 카운터 담당이래도 상관없었다. 그냥 마음 어디선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그렇게 간 첫 날의 기억은, 흠. 딱히 좋진 않았다. 조용하고 자기에게 집중할 수 있는 운동을 선 호하는 나로서는 여기저기서 쉐도우 복싱을 하며 땀냄새를 풍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배운다는 것 이 상당히 불편했다. 대부분이 나보다 어리지만 기세 좋은 고등학생들 같았고, 나는 기죽은 상태 에서 소위 말하는, 냥냥 펀치(나름 귀엽게 표현했지만 사실 허접했다)를 날렸다.


이틀째, 삼일째가 되어도 재미는 안 붙고 가기 싫은 마음만 더 커졌다. 이런 운동은 타고나는 사 람들이 있다. 몸 자체가 딴딴하고 날렵한 사람들. 나는 정반대다. 어렸을 때부터 쭉 운동과는 거 리가 멀었고, 이따금 스피닝이나 홈 트레이닝을 한 게 다다. 몸이 아주 무겁게 느껴지는 사람이란 말이다.


복싱장 거울에 비춰 보이는 나라는 존재가 참 별로였고, 왜 굳이 내가 돈을 들여 이 운동을 해야 하는지 목적에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거기서 나는 최약체, 최약자였다. 운동을 가기전부터 불안하고 가기 싫어 미칠 것 같았고, 어찌저찌 갔다온 후에는 다 죽어가는 몰골로 가족에게 내가 얼마나 힘들었고, 얼마나 가기 싫은지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럴때마다 엄마와 아빠는 내 게 “그러면 안 가면 되잖아,” 내지는 “이번 달까지만 하고 그만다녀.” 라는 아주 좋은 조언을 해주 었다. 근데, 난 정말 가기 싫은데 어쨌든 그만 다니거나 안 갈 생각은 안 들었다. 그것은 내 선택 지에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이 복싱장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거창한 포부는 당연히 아니었다. 좀 복합적인 것 같았다. 어 쩌다보니 취향이 변했다. 힐을 신고 부드러운 선을 강조하는 춤을 추는 아이돌보다 거칠고 힘 있 는 여자 아티스트에 눈길이 갔고, 남초 직장에서 어떻게든 버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사 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으니까. 취향이 변하는 시간동안 나를 분노하게 만들거나 무 력감을 느끼게 만드는 사건들을 접하거나 내가 순간순간 느꼈던 부당함이, 억울함이 있었고 나는 좀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냥 여기서는 “어쩌다보니” 라고 뭉뚱그려서 말하고 싶다.

내가 뭘 한 건 아니다. 손가락질받거나 평가당할까 두려워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규정하지도 않았고, 여성주의를 혐오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목소리 한번 높여본 적 없다. 그냥 여성의 이 야기를 전달하는 유튜브 채널에 구독, 좋아요를 누르고, 여남공용 쇼핑몰에서 괜히 한번 옷사고, 그게 다다. 스스로도 좀 비겁하지만 이 이상 날 더 드러내는 상황이 많이 두려워서 앞으로도 이 렇게 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맞지도 않는 복싱을 붙잡고 있는 까닭은,


내가 복싱장에서 여자 사범님을 보았을 때 느꼈던 안도감과 용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또 주고 싶 기 때문이다. 사범님이 지나가듯이 “여자애들이 더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어.” 말해서 인 것 같기 도 하고. 누군가 조금 더 강해지고 싶은 마음에 복싱장에 들어왔을 때, 주먹 하나 제대로 못 치고 허우적대는 나 같은 여자사람도 여기에 있다고 북돋아주고, 처음의 나처럼 남성들의 공간에서 주 눅 들고 위축되지 말라고 신호를 보내주고 싶은 것 같다.


복싱장에서 여성 분을 보게 되도, 애초에 성격이 무뚝뚝해서 내가 먼저 다가가는 일은 없을거다, 절대. 그렇지만 그 날의 나는 주먹에 좀 더 힘이 잘 들어가고, 괜히 숨 한번 덜 헐떡일 거다. 그 리고 이게 내 연대의 방식이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지위도 없는 불안정한 대학생인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으로 최대한 오래 버티는 것.


내가 상대적으로 외로움에 무디고 사람에 관심이 없어서 고독을 잘 견딘다. 그래서 복싱장에서 잘 버틸 것 같다. 친구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복싱을 배우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다들 요가나 필 라테스, 걸스힙합에 흥미가 있는 것 같다. 복싱이 언젠가는 그 운동들과 비슷한 비율로 친구들의 입에서 거론되는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 내가 조용히 여기서 버티고 있겠다.


이거 진짜 할 만하다.



주제 :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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