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부문 [차하]

야망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라는 사람에게는 말이다. ‘맞아’보다는 ‘맞을 걸’을, ‘싫어요’보다는 ‘괜찮아요’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요구 받는 사회에서 크게 무언가를 이루어 보겠다는 희망이 생기기가 힘들었다. 아니, 어쩌면 희망이 없었다. 남(男)들만큼 살기가 참 어려운 이곳에서 야망은 내게 너무 버거운 존재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어릴 적에는 야망과 가까운 사이였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다. 반장은 물론, 회장을 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조별 발표에서도 꼭 조장을 맡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인정 욕구가 큰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냥 나서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이끄는 과정 하나하나가 내게는 벅참 그 자체였다. 회장이 되기 위해 전교생 앞에 나가 연설을 했을 때는 “지금은 백명 남짓이지만, 꼭 천명 아니 만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도 말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작 13살인 아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참 놀랍다.
그런 야망은 점차 커져갔다. 무엇이 되었든 유명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내가 아는 가장 유명한 사람은 대통령이었다. 그러곤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나의 다짐을 비웃듯 줄곧 좌절을 주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남녀공학인 중학교에서는 학생회장 투표는 인기투표였고, 학생회장은 소위 잘생기거나 성격이 좋은 남자가 당선되었다. 그 때도 참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학교를 대표하고 학생을 위한 일을 하는 회장을 얼굴을 보고 뽑는 다니 참으로 웃긴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때 나에게는 이는 웃긴 일도, 화나는 일도 아닌 슬픈 일이었다. 나의 원대한 꿈으로 향하는 길에서 낙오된 그런 기분이었다.
야망: 세상이 좁다면 세상을 바꾸는 것
열음비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야망이란, 담고 있으면 더 슬픈 것이 되어버렸다. 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선생님의 잘못을 지적했을 때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그랬고, 말도 안되는 교칙을 바꾸어 나가면서 당돌한 아이라고 칭하는 어른들의 말들이 그랬다. 그리고 깨달은 건 유명한 사람이 되겠다는 야망은 내가 가진 생각을 숨겨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야망 따위 버리기로 했다. 나를 숨기고 억압받는 것이 더 괴롭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야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정말로 내게 어울리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적어도 3년 간 내가 숙명여대에 있으면서 나는 크게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희망이 누구보다 가득한 사람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을 담기엔 이 사회가 너무 좁고 뒤쳐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나의 큰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단지, 이전의 야망과 바뀐 것이 있다면 유명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그런 내가 빛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내가 이뤄가야 할 큰 꿈이다.